그룹 카라 출신의 구하라 양이 11월 24일 극단적 선택(현재까지의 정황으로 봐서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지난 10월 설리(본명:최진리) 양이 세상을 떠난 충격이 채 가시기 전에 다시 한번 발생한 아이돌 출신 연예인의 슬픈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하는 분위기입니다.
구하라 양은 과거 전 남자친구와의 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등 최근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설리 양의 사건이 있은 후로 자신은 힘을 내어 이겨 내겠다는 각오를 밝히면서 최근에는 일본 콘서트를 열기도 하는 등 다시 한번 의욕적인 모습을 보여 왔기 때문에 이번 그녀의 갑작스런 비보는 더욱 큰 충격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설리 양은 여성 속옷 착용과 관련하여 끊임없는 논란에 휩싸이는 등 구하라 양과 비슷한 상황을 이어가던 끝에 끝내는 돌아오지 못할 선택을 하고 말았다는 말이 많습니다. 이른 바 사이버불링(cyber bullying)이라 불리는 인터넷 상의 괴롭힘이 그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구하라 양 역시 설리 양과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마침내는 설리 양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면서 이른 바 "베르테르 효과"의 희생양이 되고 만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봤습니다.
베르테르 효과를 이야기하자면 과거 최진실 씨 일가족에게 있었던 비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똑순이처럼 항상 당당하고 아름다웠던 최진실 씨가 2006년 극단적인 선택을 한 후, 동생이자 배우이면서 가수로도 활동했던 최진영 씨 4년 후 역시 같은 선택을 하였고, 마지막으로는 최진실 씨의 전 남편이었던 야구 스타 조성민 씨 2013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엄연한 시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베르테르 효과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만, 모든 사생활이 대중에게 노출된 채 살아 가는 연예인들은 일반인과는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특별한 감수성을 공유하는 다른 연예인에게 느끼는 동질감도 남다를 것이라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최진실 씨 일가에 닥친 비극은 이런 특수한 감성이 가족이라는 특별한 관계와 연결되면서 발생한 비극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베르테르 효과(Werthers effect)"라는 말은 1974년 데이비드 필립스라는 학자가 연예인 자살이후 급증하는 자살율을 연구하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에서 이름을 따온 데서 유래합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쓴 이 소설은 당 시대의 젊은이들 사이에 노란 바지와 파란 자켓을 입는 유행(소설 속 베르테르의 외양에 대한 묘사)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베르테르가 자신의 사랑이 거절당한 것을 비관하여 자살함-까지 흉내내기 시작하면서 몇 몇 국가에서는 금서로 지정되기까지 합니다.
베르테르 효과란 이렇게 자신이 동일시하는 대상의 죽음을 흉내내어 자신 역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동조화를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베르테르 효과에 대한 연구 결과를 살펴 보면, 자살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유명인일수록, 그리고 집단자살이나 가족자살처럼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자살의 이유가 실제 자신이 처한 상황가 유사하다고 느낄수록 모방자살 역시 증가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을 확산시키는 역할은 누가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미디어(언론)입니다. 그리고 언론에 실린 이 기사에 사회적인 관심이 많이 몰리면 몰릴수록 베르테르 효과는 강한 전염성을 가지게 됩니다. 설리 양의 비극적인 선택에 이은 구하라 양의 죽음과 별개로 최근 일가족 집단 자살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즉, 언론에서 연예인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악성 댓글 탓으로 돌리고, 일가족의 비극 뒤에 우리의 무관심이 있었다고 자책하는 기사가 많이 실리면 실릴수록 이러한 베르테르 바이러스는 높은 사회적 관심을 타고 우리 마음 속으로 들어 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에 심정적으로 이끌리는 사람들은 그 기사가 방아쇠가 되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방 자살"을 막기 위해 유럽 여러 나라 중에는 자살 기사 보도에 대한 엄격한 기준을 정해 놓기도 합니다.
필자는 이런 비극적인 소식이나 그런 비극이 발생한 원인들에 대해 냉정하자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 잡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해당 사실을 전달하는 언론사들은 최대한 냉정한 어조로 기사를 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입니다. 적어도 독자를 자극하여 다른 기사를 찾아 나서게 하는 자극적인 기사 만큼은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네이버의 실시간 검색어를 보면 구하라의 전 남자친구라는 검색어가 몇 시간 째 상위에 머물고 있고, 그 사람이 SNS 계정을 폐쇄했다는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기사로 나오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비극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그 사람을 돌로 침으로써 자신들은 결백하다고 말하고 싶은 대중의 야만성이 다른 피해자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야만성을 경계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지만, 이런 대중을 선동하지 않는 것이 미디어의 의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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