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하루끼와 소설

여수의 사랑 - 한강

한강 작가 처럼 너무 무거운 소설은 읽지 않는다는 주의지만, 맨부커상 수상 이후 훌쩍 높아 진 그녀의 위상에 계속 외면할 수 없어 그녀의 예전 단편집을 골라서 읽게 되었다.

여수의 사랑에는 당연히 - 왜 당연히 라는 표현이 들어가야 되는 지 모르겠지만 - 사랑이 없다. 사랑은 고사 하고 상처를 원죄처럼 끌어 안고 사는 사람들의 처절한 몸부림 만이 가득하다. 심지어 여수의 사랑에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의 이름은 자흔이다. 국어사전에 자흔을 찾으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 "흠이 진 자리. 흠이 된 자리." 허물 자(疵)에 흔적 흔(痕)을 쓴다. 하지만 이름에 대해 질문하면 자흔은 "기쁠 흔" 자를 쓴다고 하나도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하곤 했다.(P.13) 역설적인 명명을 통해 그녀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수의 사랑에 나오는 두 여인, 정선과 자흔은 과거의 상처 때문에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상처는 태생적이고 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주어 진 원죄 같은 것이다. 그 때문에 정선은 결벽증이 되었고, 자흔은 정착하지 못하고 고독 속에서 세상을 떠돌아 다닌다. 마침 내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만나, 기대고, 부둥켜 안고, 의지하며 치유를 찾아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뿌리 깊은 상처는 그들이 평범으로 돌아 오는 걸 기어이 막아 선다. 그렇게 그들은 죽음을 통해서만이 그토록 원하는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것 처럼 보인다.

<중략>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에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에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었어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 외로운 운명이 그렇게 찬란하게 끝날 거라는 것이 얼마나 기뻣는지,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는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 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 오게 하고 싶었어요......

<후략>

인간에 대한 한강의 이해는 깊다. 그녀는 말하고 싶지 않은, 숨기고 싶은 인간들의 상처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태어날 때 - 혹은 아주 어린 유년기에 낙인처럼 새겨져 - 이미 갖게 되어 버린 상처. 그 상처는 도망치고 외면하려 발버둥 칠 수록 사람을 옭아맨다. 유일한 치유의 길은 그 상처와 대면하는 것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