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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끼와 소설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 윤대녕

휴게소, 공항, 역, 터미널 - 우연과 필연이 마주치는 지점 중에서

<중략>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소설을 쓰기 위해 차에 짐을 가득 싣고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다가, '천안삼거리 휴게소'에서 밥(병천 순대 국밥이었다)을 먹고 있는데,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남녀가 마치 필연적인 장면처럼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등을 보인 상태여서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여자는 나와 마주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여자는 한때 나와 사귀었던 의상 디자이너였고 가끔 여행도 함께 다녔으며 내게 청혼을 한 바도 있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직장을 갖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후 그녀는 대기업에 근무하는 자와 결혼을 했고 내게는 청첩장 조차 보내 오지 않았다. 나는 숟가락을 든 채 망연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뒤미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꽤나 놀란 눈치였다. 나는 그녀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조금 웃어 보였으나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금세 눈길을 피했다. 이해할 만한 상황이어서 나는 서둘러 남은 밥을 꾸역꾸역 입안에 퍼 넣었다. 되도록 신속하게 자리를 피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 후 그녀가 나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을 들어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아까 내가 그랬듯이 어색한 표정으로 슬쩍 웃어 보였다. 나는 거울을 마주 보는 심정으로 따라 웃어주었다. 그리고 잠시 그녀와 복화술로 이런 대화를 나눴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오랜만이네요."

"전생의 일이련만, 아직도 나를 기억하는 모양이군."

"얼마 전에 신문에 나는 인터뷰 봤어요. 책이 또 나왔더군요."

"상관할 것 없잖아?"

"여태 화가 안 풀린 모양이네요."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왜 너한테 화를 내겠어, 다만 내 일에 관여하지 말아줬으면 해. 바로 내가 하는 일 때문에 너와 인연이 어긋난 거였잖아."

"후후, 결혼은 했나요?"

"글쎄올시다, 근데 여긴 어쩐 일이신가?"

"남편과 부산 시댁에 가는 길이에요. 인사시켜줘요?"

"원, 천만의 말씀. 앞으로 다시는 이런 식으로 해후하지 말자."

"끄덕끄덕, 그럼 내세에서 봐요. 그땐 당신과 기꺼이 결혼해 드릴게요."

"고맙구먼. 그럼 나 먼저 일어나지. 갈 길이 바쁘거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 그녀는 문득 환하게 웃었다. 지금도 나는 그때 그녀를 거기서 우연히 만났다는 사실을 아주 다행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아마 휴게소가 아니었더라면 그녀와 만나는 일은 평생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듯 휴게소는 만남과 헤어짐이 동시에 발생하는 곳이며 또한 우연과 필연이 마주치는 마주치는 공간이기도 하다....

<후략>


윤대녕의 글을 읽고 나면 어디론가 즉흥적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이 지구 어딘가에서 어떤 "운명적인 만남"이 지금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그것을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갑자기 조바심이 드는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인가를 속아서 훌쩍 떠나와서야, 나는 다시 한국에 있는 이들이 너무도 그리워 호텔 방에 빈 맥주 병들을 줄줄이 세워 놓고 끝도 없는 국제전화를 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