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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끼와 소설

1973년의 핀볼 -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노르웨이의 숲에서 주인공 와타나베는 스콧 F.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 여덟 살의 내게 있어 최고의 책은 존 업다이크의 『켄타우로스』였는데, 몇 번인가 되풀이해서 읽는 사이에 그 책은 서서히 처음의 빛을 잃고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게 베스트 원 자리를 물려주게 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개츠비』는 그 후 줄곧 내게 최괴의 소설로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마음이 내킬 때마다 책장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어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는, 그 부분을 한동안 탐독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는데, 단 한 번도 실망을 안겨주지 않았다....>

나의 십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책이 "노르웨이의 숲" 이었다면 내 이십대를 지배했던 하루키의 작품이 "1973년의 핀볼"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였다. 하루키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말했듯, 이십 대의 나에게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실망하지 않는' 유일한 소설이 앞의 두 작품이었다.

하루키 역시 두 작품에 대해 "더  이상 손을 댈 곳이 없다. 불완전한 채로 의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1973년의 핀볼 중에서>

(중략)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은 대열의 저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화려하게 치장한 동료들 사이에 끼여 아주 얌전하게 보였다. 깊은 숲속 평평한 바위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나는 그녀 앞에 서서, 그 그립고 정겨운 보드를 바라보았다. 검푸른 우주, 잉크를 엎지른 듯한 파랑이다. 그리고 조그맣고 하얀 별. 토성, 화성, 금성...... 바로 앞에는 순백색 우주선이 떠 있다. 우주선 창문에는 불이 켜져 있고, 그 안은 마치 어떤 가족의 단란한 한때처럼 보인다. 어둠속에서 몇 줄기 유성이 선을 그으며 흐른다.

필드도 옛날 그대로였다. 똑같은 검푸른 색 타깃은 미소로 드러나는 이처럼 새하얗다. 별모양으로 쌓여 있는 레몬 옐로  빛 열 개의 보너스 라이트가 천천히 빛을 오르내리게 한다. 두 개의 킥 아웃 홀은 토성과 화성, 로트 타깃은 금성...... 모든 것이 정밀함으로 채워져 있다.

오랜만이야, 라고 나는 말했다. 아니,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그녀의 필드 유리판에 손을 얹었다. 유리는 얼음처럼 싸늘하고, 내 손의 온기는 하얗게 김 서림 열 개의 손가락 자국을 거기에 남겼다. 그녀가 간신히 눈을 떴다는 듯 내게 미소짓는다. 정겨운 미소였다. 나도 미소로 답한다.

꽤 오랫동안 못 만난 것 같군요, 라고 그녀가 답한다. 나는 생각하는 척하며 손가락을 꼽아본다. 3년 정도지. 눈 깜짝할 사이야.

우리는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잠시 말을 잊는다. 찻집이라면 커피를 홀짝거리거나, 손가락으로 레이스 커튼을 만지작거릴 장면이다.

종종 네 생각을 해, 라고 나는 말한다. 그리고 소름 끼치도록 비참한 기분이 된다.

잠 못 이루는 밤에?

음, 잠 못 이루는 밤에, 라고 나는 되풀이한다. 그녀는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안 추워요? 라고 그녀가 묻는다.

춥지, 아주 추워.

너무 오래 있지 않는 편이 좋겠어요. 당신은 견디기 힘들 거에요.

그렇겠지, 라고 나는 대답한다. 그리고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연기를 들이마신다.

게임 안 해요? 라고 그녀가 묻는다.

안 해, 라고 나는 대답한다.

왜죠?

16만5천이 내 최고 스코어였어. 기억하고 있나?

물론 기억하고 있죠. 나의 최고 스코어이기도 했으니까.

그 숫자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 라고 나는 말한다.

그녀는 말이 없다. 열 개의 보너스 라이트만이 천천히 오르내리며 점멸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발 밑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웠다.

왜 왔는데요?

네가 불렀어.

내가 불렀다구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쑥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그래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불렀는지도.

얼마나 찾아다녔다구.

고마워요, 라고 그녀는 말한다. 무슨 말이든 해 봐요......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