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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끼와 소설

삿뽀로 여인숙 - 하성란

 

하성란 이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모 그룹의 백화점 계열사에 합격하고 입사를 기다리고 있을 쯤이었다. 아마도 모 일간지 - 혹은 잡지였는지도 모르겠다. - 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이미 상당한 인지도와 인기를 확보하고 있던 신경숙, 공지영, 은희경 등 당대 여성 작가들과 더불어 그녀의 소설 삿뽀로 여인숙이 소개되었던 것이다.

당시 내게 최고의 작가는 하루키였고, 그닥 여성작가의 글을 선호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당시 대신 할 일이라고는 스타 크래프트 정도 밖에 없었기 때문에 동네 도서대여점에 가서 그 책을 빌어다 단숨에 읽어 내려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블로그를 다시 열고, 기억에 남는 작가들의 글을 하나씩 다시 읽고 정리하면서 이 책을 떠올리게 된 것은 아마도 삿뽀로 라는 지명 때문일 것이다. 2013년 처음 일본을 방문하고 1년 내 내리 세 번을 다녀 오면서 삿뽀로는 나에게 '언젠가 한번 꼭 다녀와야 할 어떤 곳' 이었다.

세번째 직장에서 만난 '니카이도' 상은 홋카이도의 여름을 이렇게 표현했다.

'거리가 있고, 거리에는 노천카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어요. 홋카이도의 여름은 다른 곳보다 훨씬 시원해서 여름에는 사람들이 불빛에 홀린 오징어 떼처럼 몰려 들어 노천 카페에서 맥주를 마시곤 하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설 <삿뽀로 여인숙>에는 삿뽀로가 없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그리고 새로운 퍼즐이 주어지는 아주 마지막 부분에 잠시 등장할 뿐이다. 당시 나는 책을 다 읽고 왜 <삿뽀로> 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교토나 오사카나 후쿠오카나 벳푸가 아닌. 설국의 무대였던 니가타도 좋을 법 했는데.

<삿뽀로 여인숙>은 여자를 위한 소설이다. 아마도 나는 여자들이 이 소설에서 느끼는 것의 100분의 1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은 예로, 여고생이 선생님에게서 사랑을 느끼는 대목에서 집 사람은 그 묘사가 소름끼칠 정도라고 했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상처 입은 한 여자 아이의 상실과 극복, 성장 이야기 이외의 어떤 것도 아니었다.

하성란은 결론을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독자들에게 맡기고 끝을 맺는다.

<중략>

"이진명이라고 물러 봐. 진명아, 하고 불러보란 말이야."

얼굴이 실내복 상의에 묻혀 있었지만 윤미래가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천을 통해 나온 목소리는 그것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네 이름도 모를까봐?"

"그럴까? 그럼 왜 한번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니?"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윤미래가 머리를 동여맨 고무줄을 풀었다. 머리카락이 부스스 일어섰다. 책가방을 들고 문으로 향하던 윤미래의 등에 대고 난 하기 싫었던 말을 해야 했다.

"윤미래, 난 이진명이야. 똑똑히 봐두라구. 이 뺨에 상처 보이지? 난 선명이가 아니야. 선명이는...... 선명이는 죽었어."

구두에 발을 꿰던 윤미래의 몸이 정지 동작으로 굳었다. 잠시 후 거대한 보푸라기 같은 머리카락 너머에서 짧고 신경질적인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윤미래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네가 진명일까?"

목소리는 작았고 전혀 엉뚱한 방향을 향해 쏟아졌지만 난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윤미래가 천천히 뒤돌아섰다. 윤미래의 집게손가락이 정확히 내 코 언저리를 향해 있었다. 난 앉아서 코 언저리에서 그 아이의 집게손가락이 헤집어놓은 공기의 파동을 느끼고만 있었다. 윤미래가 조금씩 내 앞으로 다가왔다. 바로 내 무릎 가까이 와서 섰을 때 난 그애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잔뜩 뒤로 젖혀야 했다. 윤미래는 아랫입술을 내밀어 입김으로 눈을 가린 머리카락을 불어 올렸다.

"네가 이진명이라고? 날 헷갈리게 해놓고 이제 와서 발뺌을 하겠다는 거야?"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