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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끼와 소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 무라카미 하루키

2016년 1월 11일 새벽 6시, 나는 스키폴 공항에서 취리히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취리히 행 비행기의 탑승이 시작될 것이었고, 나는 커피숍이, 정확히는 커피숍 안에 있는 흡연실이, 문을 여는 시간과 보딩 사이의 짧은 시간을 이용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강화유리 너머로 보이는 활주로는 아직 어둠에 쌓여 있었고, 한 눈에 봐도 슬라브 계임이 분명해 보이는 블론드 머리의 날씬한 여학생이 담배를 문 채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었다. 머리가 희끗한 백인 남자가 다가 와서 라이터를 켜는 흉내를 내길래, 나는 주머니의 라이터를 꺼내 주었다. 그는 불을 붙여 급하게 한 모금 피더니 이제 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Thanks"라고 말한다.

"where are you from?"

남자가 묻는다.

"Korea."

남자가 한 눈에 봐도 과장된 웃음을 짓는다.

"Oh, south or north?"

"I am from south Korea."

늘 이런 식이다. 잠시 김정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Safe trip!" 이라는 말과 함께 그가 먼저 흡연실을 나간다.

잠시 후, 보딩 시작을 알리는 방송이 들려 온다. 나는 담배를 끄고 자리를 떠났다.

 

<노르웨이의 숲 중에서...>

서른 일곱 살이던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내려와,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둡게 물들이고  있었고, 비옷을 걸친 정비공들, 민둥민둥한 공항 빌딩 위에 나부끼는 깃발, BMW의 광고판 등 이런저런 것들이 플랑드르파의 음울한 그림의 배경처럼 보였다.  아, 또 독일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금연등이 꺼지고 기내의 스피커에서 조용한 배경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 (Norwegian  Wood)>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언제나 처럼 나를 어지럽혔다. 아니, 다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내 머리 속을 어지럽히며 뒤흔들었다.

나는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아 몸을 움츠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그대로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독일인 스튜어디스가 내 앞으로 오더니 어디가 불편하냐고 영어로 물었다.  괜찮다, 좀 현기증이 났을 뿐이라고 나는 대답했다.

"정말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스튜어디스는 생긋 웃으며 가버렸고, 음악은 빌리 조엘의 곡으로 바뀌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북해의 상공에 떠 있는 어두운 구름을 바라보면서,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잃어버린 시간, 죽었거나 또는 사라져 간 사람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지난 기억들을.

비행기가 완전히 멈춰, 사람들이 좌석 벨트를 풀고 가방과 옷가지 등을 선반에서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나는 줄곧 그 초원 속에 있었다.  나는 풀 냄새를 맡았고, 살갗에 와 닿는 바람을 느꼈으며, 새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1996년 가을이었고, 내가 곧 스무 살이 될 무렵이었다.

아까의 스튜어디스가 다시 와서 내 옆에 걸터앉더니 이제 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어쩐지 좀 외로워졌을 뿐이에요(It's  all right  now, thank you. I only felt lonely, you know)."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요, 저도 가끔 그러니까요(Well, I feel same way, same thing, once in a while. I know what you mean)."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흔들며 좌석에서 일어나 매우 유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빌겠어요.  안녕히(I hope you'll have a nice trip. Auf Wiedersehen)!" 

 "안녕히(Auf Wiedersehen)!" 하고 나도 말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