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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끼와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무라카미 하루키


<중략>

나는 끔찍한 꿈을 꾸었다.

나는 커다란 검은 새가 되어 서쪽을 향해 정글 위에 날고 있었다. 나는 깊은 상처를 입어 날개에는 핏자국이 검게 엉겨 붙어 있었다. 서쪽 하늘에는 불길한 검은 구름이 하늘 가득 퍼지기 시작했고 주위에서는 어렴풋이 비 냄새가 났다.

오래간만에 꾸는 꿈이었다. 너무나 오래간만이라 그게 꿈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도 긴 시간이 걸렸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온몸의 끈끈한 땀을 샤워를 하며 씻어 내고 나서 토스트와 사과 주스로 아침을 때웠다. 담배와 맥주 때문에 목구멍에서는 마치 오래된 솜을 쑤셔 박아 넣은 것 같은 맛이 났다.

식기를 싱크대에 던져 넣은 후 나는 올리브 그린색 양복과 가능한 한 잘 다림질된 셔츠, 그리고 검은 니트 넥타이를 골라서, 그것을 든 태 응접실의 에어컨디셔너 앞에 앉았다.

텔레비젼 뉴스 쇼의 아나운서는, 오늘은 금년 들어 최고로 더운 날이 될 겁니다, 하고 의기 양양하게 단언하고 있었다. 나는 텔레비젼을 끄고 옆의 형 방에 들어가 방대한 책 더미 속에서 몇 권을 골라 응접실의 소파에서 뒹굴면서 그걸 봤다.

2년 전, 형은 방안 가득한 책과 자기의 여자 친구를 남겨 놓은 채 이유도 말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버렸다. 그녀와 나는 이따금 함께 식사를 한다. 그녀는 우리 형제는 정말로 많이 닮았다고 말했다.

"어디가요?"

나는 깜짝 놀라서 그녀에게 물어 보았다.

그녀는 "전부 닮았어요"하고 말했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우리가 10년 넘게 교대로 구두를 닦아 온 탓이라고 생각했다.

시계는 열두 시를 가리켰고, 나는 바깥의 더위를 상상하며 진저리를 치면서 넥타이를 매고 재킷을 입었다.

시간은 충분했으며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차를 타고 거리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바다로부터 산을 향해서 뻗은 비참할 정도로 좁고 긴 거리다. 강과 테니스 코트, 골프 코스, 즐비하게 늘어선 넓은 저택, 벽 그리고 벽, 몇 개의 아담한 레스토랑, 고급 의상실, 낡은 도서관, 달맞이꽃이 무성한 들판, 원숭이 우리가 있는 공원, 거리는 언제나 똑같았다.

나는 고지대 특유의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동안 돌고 나서 강을 따라 내려가 하구 근처에 차를 세우고 강물에 발을 담갔다. 테니스 코트에서는 보기 좋게 선탠을 한 여자 두 명이 흰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낀 채 서로 볼을 주고받고 있었다. 햇살은 오후가 되자 갑자기 강렬해져 그들이 라켓을 휘두를 때마다 땀이 코트에 떨어졌다.

나는 5분 가량 그 모습을 바라보고 나서 차로 돌아와 시트를 뒤로 젖히고 눈을 감은 채 한동안 파도 소리에 뒤섞인 공 치는 소리를 하릴없이 멍청하니 듣고 있었다. 희미한 남풍이 실어 온 바다 내음과 불타는 듯한 아스팔트 냄새가 나로 하여금 오래 전의 여름을 연상하게 해주었다. 여자의 피부의 온기, 오래된 로큰롤, 갓 세탁한 버튼 다운 셔츠, 풀의 탈의실에서 피운 담배 냄새, 희미한 예감, 모두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달콤한 여름날의 꿈이었다. 그리고 어느 해 여름(언제였던가?), 꿈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후략>


내가 하루끼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니, 벌써 10여년이나 지난 셈이다..

하루끼 최대의 히트작인 <상실의 시대>부터 시작해 그의 데뷔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세계의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 <태양의남쪽, 국경의서쪽> 국내 발간 단편집인 <화요일의 여자들> 기타 등등등....

나의 십대 후반과 이십대는 거의 하루끼의 정서가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나의 모토는 이것이었다..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둘 것.. 내가 믿는 것은 오직 애정 뿐>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서 서른이 넘었다..

그 동안 나는 더 이상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둘 수도 없었고...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몇 명의 여자들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다..


가끔 다시 한번 돌이켜생각해 본다.. 행복한가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