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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끼와 소설

그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 윤대녕



<중략>


삶의 한가운데, 감동이 유독 잦은 때가 있었습니다. 때없이 목이 메던 순간들 말입니다. 그 모든 소리들, 그 모든 풍경들, 그 모든 사람들이 저를 목메게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스무 살 전후해서 그 후 몇 년간. 누구나 가슴 벅차고 그만큼 괴로웠을 생의 한가운데. 그런 때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뜸하게 찾아옵니다. 생의 모든 순간은 단 한 번 왔다 가는 것. 헤어진 지 몇 년 만에 누군가를 만나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음악을 들으며 똑같은 차를 마셔본들 느낌은 전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전혀 다른 존재와 서로 만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기다립니다. 그렇게도 마음 졸이며 괴로워하고 긴 기다림 뒤에 가슴이 절대 환희에 타오르던 순간들을 말입니다. 그것이 미혹이었고 다만 젊음이었다고 해도 좋습니다. 다시 장마철 처마 밑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밤새 서 있고 싶습니다. 새벽 두시인가 세시에 불현듯 깨어나 배꽃이 보고 싶어 십 리가 넘는 배밭을 달빛을 따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다시 그래볼 수만 있다면.

하학길 버스 정류장에 서서 그 여학교 3학년 2반 25번 학생을 다시 기다려볼 수 있다면. 무작정 바다가 있는 쪽을 향해 가출을 할 수만 있다면. 돌아와 매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 시절 나는 어두운 방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자주 들여다보고 있었지. 아주 심각한 얼굴을 하고 말입니다. 그 울울했던 시절로 단 한 번 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한데,

어느덧 서른 살의 때가 다 지나고 있습니다. 나는 내 나이를 아주 좋아하며 사는 스타일이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하나 서글픈 것은 한 번 다녀간 생의 그 모든 사소한 것들이 결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시간보다 조금 앞서 떠나야 할 모양입니다. 돌아보지 않기 위하여. 시간에 끌려가지 않기 위하여. 조금 먼저 나를 끌고 무언가를 찾으러 제 발로 앞서가야 하는 때가 온 모양입니다.

약속하지 않고 와도 좋습니다. 어디를 가든 나는 당신과 마주치곤 했습니다. 그 야릇하고도 미묘한 시간의 기울기 속에서.

이제 새벽의 놀라운 빛을 마중할 차비를 해야겠습니다. 아, 여태도 설명할 길 없는 그 푸르른 시간의 마술 같은 한때!

 

----------------윤대녕 <그대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것들> 중에서---------------

 

내가 지금의 딱 절반을 살았을 때, 나의 목표는 서른이 되면 은퇴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