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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끼와 소설

댄스 댄스 댄스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를 처음 만난 것이 92년도였으니, 벌써 25년이나 전의 일이다. 그 때 태어난 아이가 같은 회사에서 같이 월급을 받으면서 다니고 있으니, 참 감개무량한 일이다.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읽고, <1973년의 핀볼>을 읽고,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고, <댄스, 댄스, 댄스>를 읽고, <수요일의 여자들>을 읽고, 다시 <노르웨이의 숲>으로 돌아 와서 그 책을 끝도 없이 반복해서 읽었다. 제일 먼저 산 책을 잃어 버리기 전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53번째 읽는 것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으니, 그 이후로 읽은 것을 포함하면 60에서 70번 정도를 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레코드판이었다면 홈이 다 닳아서 없어질 지경으로 읽어댔던 것 같다.

그리고 2001년 학교를 졸업하고는 십 년 넘게 하루키를 읽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고, 회사를 옮기고, 사람들을 만나고, 결혼을 했다.

<댄스, 댄스, 댄스>는 경쾌한 소설이다. 하루키는 이전에 발표된 작품에 비해 훨씬 쉽게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전 작품들이 '무엇인가를 찾는' 여정이었다면, 이 책에서 하루키는 그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결론을 얻은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댄스, 댄스, 댄스>의 어조는 매우 담백하고 이해하기 쉽다.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은 청춘 3부작이면서 청춘 3부작이 아니다. 청춘 3부작의 대단원 같은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은 잘 먹고 잘 살았다... 라는 이야기다.

문득 스무 살의 내가 하루키의 책에서 느꼈던 그 황홀했던 떨림을 일생에 다시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슬퍼졌다.


<중략>

"유미요시!"라고 나는 큰 소리로 불렀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과 냉기가 한데 어우러져 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어둠이 한층 더 깊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유미요시!"라고 나는 한번 더 외쳤다.

"이봐요, 간단해요." 라고 벽너머에서 유미요시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정말 간단해요. 벽을 빠져나오면 금방 이쪽으로 올 수 있어요."

"그렇지 않아!" 라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간단한 것처럼 보여. 하지만 그쪽으로 가버리면 다시 돌아올 수 없어. 당신은 그걸 모르고 있어. 거기는 아니야. 거기는 현실이 아니라고. 거긴 저쪽 세계야. 이쪽 세계와는 다른 곳이라고."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또다시 깊은 침묵이 방에 가득 찼다. 마치 바다 속에 있는 것 처럼 침묵이 내 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유미요시는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무리 손을 뻗쳐도 그녀에게는 미치지 않는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저 벽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다. 너무 가혹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무력감. 너무 가혹하다. 나와 유미요시는 이쪽에 있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그걸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왔다. 나는 그걸 위해 복잡한 스텝을 밟으면서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꾸물거리고 있을 틈이 없다. 나는 유미요시를 쫓아 벽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러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유미요시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키키가 벽으로 빨려 들어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벽을 빠져나갔다. 예전과 마찬가지였다. 불투명한 공기의 층. 매끄럽고 딱딱한 감촉. 물과도 같은 차가움. 시간이 흔들리고, 연속성이 구부러지고, 중력이 뒤흔들렸다. 태고의 기억이 시간의 심연 속에서 증기처럼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내 유전자다. 나는 자신의 육체 속에서 진화의 기운을 느꼈다. 나는 복잡하게 뒤얽힌 나 자신의 DNA를 뛰어넘었다. 지구가 팽창하고, 그리고 냉각되어 오므라들었다. 동굴 속에 양이 숨어 있었다. 바다는 거대한 사념인데, 그 표면으로 소리도 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파도가 밀어닥치는 물가에 서서 앞바다를 응시하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시간이 거대한 실 덩어리가 되어 하늘에 떠 있는 게 보였다. 허무가 사람들을 삼키고, 그보다 더 거대한 허무가 그 허무를 삼켰다. 사람들의 살이 녹아 백골이 드러나고, 그것도 티끌이 되어 바람에 날려가 버렸다. 아주 완전히 죽어 있다, 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어쩜,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내 살은 분해되어 날려 가고, 또 하나로 응결 되었다.......

<후략>